재미론의 첫 가름, 우울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재미론의 첫 가름은 재미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재미를 추구하며,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많지만 ‘맛’을 아는 이는 드물듯이 재미를 알고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알고 즐기라는. 재미나 오락은 절대 쾌락이나 부도덕한 것이 아니고, 쾌락 또한 나쁜 말이 아닌데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맞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나는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 끝에 병이 온다고 생각한다. 고로 이 책은 나의 모토를 더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 끝에 병이 온다? 그럼 옛 선조들의 말씀이 틀린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다. 그러나 예전의 우리네와 지금의 우리네들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옛 선조들은 고생을 하면서도 즐길 줄 알았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창을 불러 흥을 돋구곤 했다. 그러나 지금 누가 일을 하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즐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짓[!]을 했다간 따돌림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네들, 현대문명은 둘째 가름에서 이야기하듯이 즐길 줄을 모르고 있으며, 노는 것을 죄악이라고, 경쟁사회에서 뒤쳐진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다. 미래나 과거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나. 암울한 과거, 고달픈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비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요새 유행하는 펀드나 보험들도 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현재를 소비하는 일이 아닌가. 물론 그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은퇴 후 노후를 설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펀드는 마치 은퇴 후 우리의 생활이 암울하다는 듯 비춰주고 있다. 보험도 그렇다. 보험은 암, 심근경색, 뇌졸중, 치매 등 우리의 생활과 질병의 관계를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시켜준다. 실제로 암이나 심근경색 등 치사율 높은 질병들이 그렇게나 많다면 왜 내 주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깜짝 놀라는 것인가? 흔한 일인데.

이 책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한다. 항상 재미와 쾌락을 추구하라는 책이다. 관광학을 30년간 가르쳐온 교수의 입장에서 많은 레저활동을 소개시켜주고, 삶을 즐길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 중, ‘정신적 쾌락이란 재미’라는 파트가 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행복은 바르고 좋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진선미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속성 중 신을 의지하는 요소가 있으며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로 세우며 사람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뜻이 있다고 한다. 무릇 위대한 사람들은 신앙에 바탕을 둔 선각자들이란다. 사람의 정신은 육체보다 더 게을러서 자기 힘만으로 ‘인간성 유지’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종교가 인간의 기쁨을 억제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고 반론을 틀어막는다. 그러면서 해결책으로 어떤 쾌락이냐가 문제이지 사람에게 쾌락추구는 수명을 연장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므로 지나치게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본다.

무신론자인 나의 입장에서 상당히 거슬리는 이야기다. 인간의 속성 중 신을 의지하는 요소가 있다고? 위대한 사람들은 신앙에 바탕을 둔 선각자들이라고? 사람의 정신은 육체보다 더 게을러서 자기 힘만으로 ‘인간성 유지’가 어렵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작가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간의 삶에 종교가 플러스적인 요소만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본다. 종교라는 것이 문명에 있어 마이너스적인 요소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쓴 만들어진 신을 본다면 알 수 있겠지만, 실제로 많은 훌륭한 사람들 중엔 무신론자들이 많다. 아이슈타인, 스티븐 호킹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신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선각자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종교가 없다면 위대하게 될 수 없다는 소린가.

사람의 정신은 게으르지 않다. 게을러지기 쉬울 뿐이지 얼마든지 부지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3-4시간씩 잠을 자고 공부만 하는 수험생이나 샐러리맨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모두 신을 믿어서인가?

물론 종교 또한 문명이 가져온 이기와 비슷한 성격의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창조해낸 과학도 적당히 사용한다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만 과용된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종교 또한 그렇다. 적당히 사용한다면 부지런해지고 위대한 사상[도저히 동의할 순 없지만]을 가질지도 모르고 당연히 그것은 그의 삶에 플러스적인 효과와 함께 재미도 가져다줄 것이다. 모든 것은 자신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재미나 휴식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미치거나 심히 불안해질 것이라는 말도 동의한다. 재미나 휴식만으로 삶이 모두 채워질 수는 없겠지만-적당히 미치거나 적당한 불안도 필요하겠지만- 재미나 휴식은 우리에게 당연히 단비같은 존재이다. 종교 또한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보이는 대로 보는 것’과 보는 대로 보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이런 말을 인용하신 분이 종교적으로 쓰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둘째 가름, 잘 못노는 현대문명을 비평한다.

맞다, 현대사회에서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뿐이다. 고정관념과 가치관, 경직된 믿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융통성을 가져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종교와 같은 민감한 문제부터 섹스, 동성애자들까지.

그렇다, 우리 세대는 보릿고개를 모른다. 밥은 굶어도 오락, 레저는 굶을 수 없다. 현대사회가 잘 못 논다는 말도 맞고, 융통성이 없다는 말도 맞다. 융통성이 없어보이는 일은 자주 일어나는데, 이를테면 이런 일이다. 50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면 소위 된장녀라고 불리는 생각없는 여자가 되면서, 50만원짜리 양주를 마시고 주량을 훨씬 넘기며 소주를 시켜대는 행위는 호쾌한 행위로 인식된다. 또, 3000원으로도 먹을 수 있는 밥을 10000원씩 주고 먹는 행위는 ‘먹는’ 행위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남들이 5만원 하는 지갑을 들고 다닐 때 50만원하는 지갑을 들고 다니면 비난받는다. 그게 바로 우리 융통성 없는 이중적인 세대이다. 모두는 자기가 융통성이 있고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글쎄.

필자가 융통성을 따질 자격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작가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게으름의 미학이 자본주의를 숭앙하는 자본가, 성직자, 경제학자, 도덕주의자들에게 은폐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느림이 죄악으로 인식되면서 게이, 호모 등의 ‘비’정상적인 남녀관계가 나온다고, 애브노멀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인간의 손에서 타락했단다.

타락? 타락은 어디에서 어디로 타락했다는 것인가? 타락이란 말은 떨어진다는 말으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건데,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지도 모르잖는가? 왜 타락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게이, 호모 등의 ‘비정상’적인-작가의 생각- 관계가 선천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게이, 호모에 대한 기록은 그 예전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전에도 존재했다.

서구식 개발 패턴을 가장 모범적으로 추종해온 우리나라가 약자를 딛고 서는 강자의 철학, 공존이 아닌 철두철미한 경쟁이라고? 왜 융통성을 추구하는 작가는 서구식 개발 패턴은 이해하지 못할까? 필자는 ‘놀이’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모범적으로 추종해야 할-아직- 모델은 서구식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너무나 자유롭다. 그들에게 거리낄 것은 없다. 진정으로 ‘재미’를 위해 사는 삶이다.

서구식 개발을 비판할 수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 최소한의 ‘재미’조차 가지지 못했던 그들이-어려운 상황 속- 개발에 유혹을 느낀 건 당연하고, 그들은 지금 최고의 ‘재미’를 느끼고 자신의 나라에 자부심을 느낀다. 미국이 약탈과 살상으로 생긴 나라라고? 우리나라가 요 근래-조선과 고려- 침략을 많이 당해서 그렇지, 삼국시대 때에는 우리도 약탈 많이 하지 않았나. 시대가 달라져서, 약탈과 살상의 스케일이 다르다고? 그렇다 하더라도 ‘욕심’에서 출발하는 약탈과 살상의 본질이 어디 가겠는가. 민족주의 같은 성질의 것들은 말릴 수 없다. 이기적이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서구를 비판할 문제가 아니다.  




셋째 가름, 현대문명, 제대로 놀리기를 위한 대안

음악에 대한 예찬, 판소리에 대한 예찬, 차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지는 예찬 시리즈는 확실히 흥미있는 예찬들이었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MP3'로 알 수 있는 우리나라의 음악사랑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고, 판소리나 차에 대한 예찬은 새로웠다. 우리 문화에 대해 재조명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가름, 재미론을 마치며

그는 재미공부를 세상에 선보이고 싶어했다. 대부분의 현장을 보고, 체험하고, 관찰하며 썼다. 세 가지 가름 속에서 다섯 가지 줄기, 현대사회에서 재미의 현실, 재미란 무엇, 어떻게 맛보나, 방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식 재미론을 풀어낸 그의 발상은 참신했다. 그러나 이 재미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작가 그 ‘자신’의 참재미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가 틀렸냐고 묻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아니다. 재미의 현실, 향낙심이 누구에게나 있고 오락 쾌락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 사람은 누구나 재미를 추구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향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시다. 그리고 그는 재미를 맛보는 방법이 누구나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고 정답이 없다는 것도 안다. 순수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존경받을만한 재미예찬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반대의 길을 걸으며 어떻게 참재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인데 말이다. 이 책은 굉장히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건, 평생교육사회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평생교육사회란 사람이 일생에 걸쳐 교육을 받는 걸 뜻한다. 지금이 평생교육사회가 아니냐고? 무슨 소리, 우리 주위에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 인생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그들의 직업에 만족을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우리네의 적성과 흥미가 직업에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성과 흥미는 정말 중요하다. 사실상 학교와 함께하는 인생의 초반은 적성과 흥미를 찾기 위한 기간이고, 그 나머지 40여년은 그 적성과 흥미를 발휘하는 시간이다. 왜? 우린 20여년간 적성과 흥미를 찾지 못했을까.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적성과 흥미에 대한 검사를 받아왔는가? 그런데도 그들이 이런 상태-적성과 직업이 이어지지 않는-가 되었다는 건 그것들 모두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20여년간 학교에서 공부한다. 아니, 공부에 삼켜진다, 공부에 찌든다. 그들은 우리에게 보다 많은 것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우리 모두-학생, 교사, 학부모-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성적이고, 경쟁이다. 그들에게, 사실 우리의 적성과 흥미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이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40여년을 함께 할 적성과 흥미라는 친구를 찾는 일인데, 그 일을 망각하다니. 이야말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시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더욱 더 우리를 자유롭게 해야하며 전문직-변호사, 검사, 판사, 의사, 금융권 종사자-들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나머지 삶을 ‘재미’와 함께하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

그것이, 평생의 삶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재미를 실현하며 사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