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전 이화여대 李御寧 교수의 고별 강연 중에서 김소월의 詩 "진달래꽃"과 "산유화"와 관련한 詩論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메밀꽃 필 무렵"도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가 완성된 헤세의 돌]

이 세상에는 똑같이 생긴 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헤세의 말대로 돌은 하나 하나가 완성되어 있습니다. 벽돌이나 기왓장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가 부서지면 규격이 같은 다른 벽돌로 갈아 끼울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돌 하나가 깨지면 그 자리만큼 지구는 비어 있게 됩니다.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 詩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법에는 "베스트 원"을 추구하고 있지만 문학과 예술에는 "온리 원"을 지향합니다. 장미를 맨 먼저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이지만 그것을 두 번째 말한 사람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제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라파엘의 일화를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천정화를 그리고 있는 라파엘의 사다리를 잡아 주라고 하는 왕의 말에 그 재상이 불만을 표시하자 그 군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잔소리 말게. 자네 목이 달아나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재상 자리를 대신할 수 있지만 라파엘의 목이 부러지면 저 그림을 대신 그려 줄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네."

▶四枝選多의 덫에 걸린 "진달레 꽃"
이화대학 교수생활은 내가 처음 대학입시 시험 감독을 맡았을 때 받았던충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국어 시험 가운데 김소월의 "진달레꽃"의 주제를 찾는 문제가 四枝選多型으로 출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詩論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인데도 어느 항목에 동그라미를 쳐야 할지 힘이 들었습니다. 그 모두에게 O 표를 달 수도 있고 그 모두에게 X 표를 달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웠던 것은 수험생들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정답을 찾아내어 동그라미를 치고 있었고, 그 뒤에도 그것이 "무즙"파동처럼 항의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리 복잡한 의미를 지닌 詩라고 하더라도 四枝選多로 물을 수 있고 O X 식으로 답하는 데 아주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까 詩의 언어도 수학 의 숫자와 다를 것이 없이 분명한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배워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한 사람을 놓고서는 맞선을 볼 수 없다"는 농담이 생겨나게 된 겁니다. 四枝選多型의 시험만 쳐 버릇해서 선을 볼 때에도 네 사람의 후보자가 앞에 있어야만 그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웃을 일이 아닙니다. "진달래꽃"의 주제를 四枝選多로 가린다는 것은 네 사람을 앉혀놓고 선을 보는 광경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이별가 인가 사랑의 고백인가
그래서 나는 교양국어나 詩論 시간에는 으레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진달래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이면 백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이별을 노래한 詩- 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학생의 국어실력 정도만 가지고 있어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조심스럽게 그 詩를 다시 읽어보면 그것이 단순한-이별가- 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우선 "진달래꽃"은 모든 時制가 미래추정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 그렇고, "말없이 고이 보내오리다"가 그렇습니다. "뿌리우리다", "흘리우리다"의 모두가 예외 없이 미래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詩를 노래하고 있는 詩의 話者는 이별과는 정 반대로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현재의 님은 역겨워하지도,떠나지도 않고 있지요. "If you go away"라고 번역된 영시에는 분명히 "If"
의 가정법으로 시작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치는 -指東擊西- 의 구조로 되어 있는 詩인 것입니다. 종래의 "가시리"형의 이별가로 고쳐 쓴다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시는 님이여,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옵니다"가 아니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그대를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었지요"와 같이 현재형이나 과거형의 진술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이별가 입니다.
하지만 미래 추정형의 가정적 체험을 읊은 "진달래꽃"은 현실적으로는 이별 아닌 사랑 체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봅시다. 누구도 이별가가 아니라 사랑의 열렬한 고백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폴리 세믹>,<그레이 존> 그리고 詩痴들
그렇지요. 가장 至高한 사랑의 기쁨을 가장 슬픈 이별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는 이 詩는 모든 언어의 뜻이 이중적으로 되어 있는 아이러니의 구조임을 알려 줍니다.산문의 언어가 한 가지 의미로 되어 있는 -모노 세믹(단일 기호)- 이라고 한다면, 詩의 언어는 "진달래꽃"의 경우처럼 구조적으로 -폴리세믹(복합기호)- 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詩의 이중적이고 아이러닉한 의미 파악에 익숙하게 되면 사물의 의미나 느낌을 흑백으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多기호체계인 詩의 공화국에서는 흑백 사이에 존재하는 어렴풋한 반원에 해당하는-회색-이 기회주의자를 상징하는 빛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김소월의 詩에서 사랑은 기쁘지만 않고 동시에 이별은 슬프지만 찾은 -그레이 존(gray zone)- 이 만들어집니다. 詩의 공화국에서는 그 -그레이 존- 이야말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삶의 체험을 깊게 하는 개척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소월의 詩를 四枝選多式의 단문으로 yes냐 no냐로 묻는다는 것은 그 詩의 복합적인 아이러니의 구조를 파괴해버리는 것입니다. 詩의 수사와 그 구조속에 서로 얽혀 있는 동그라미와 가위표는 서로 역류하고 오버랩됩니다. 그러한 구조를 무시해버리면 가는 님에게 꽃을 뿌려주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별의 양식이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린다"는 자기 감정의 억제가 한국 여성의 부덕(婦德)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 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진달래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아리랑보다도 리얼리티가 없는 노래, 교과서 같은 윤리적 메시지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음악에 음치가 있듯이 詩에는 詩痴(시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산유화"에서 비단안개
김소월은 "진달래꽃"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詩에서 반대의 일치를 노래하고 있는 아이러니의 詩的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높이 평가를 받는 국민적인 詩人이 된 것입니다. "피다"와 "지다"는 흑백 양분법의 세계에서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반대말입니다.
하지만 김소월의 詩的 공간인-靑山-에 들어오면 "피다"와 "지다"는 동일어가 되고 맙니다' 그 유명한 "산유화"의 시작 연에는 "꽃이 피네 꽃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라고 되어 있고, 끝 연에는 정반대로 "꽃이 지네 꽃지네 갈봄 여름없이 꽃이 지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구조의 진술문인데 하나는 "피네"로, 하나는 "지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어느 詩痴가 편찬한 소월 시집에는 그것이 오식인 줄 알고 마지막 연의 "지네"를 "피네"로 정정한 杜撰(두찬)도 있습니다.
피고 지는 것이 하나가 되는 소월의 "산유화"속에서는 만남과 이별도, 삶과 죽음도 하나가 됩니다. 이-반대의 일치-는 님과 만나던 때도 비단 안개였고 님과 헤어지던 때도 비단 안개라고 말한 詩 구절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이 비단 안개라는 하나의 촉매어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때의 비단 안개는 기쁨인가요 슬픔인가요. 소월의 詩는 O X로 답할 수 없는 -그레이 존- 에서 탄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비단 안개"처럼 이별을 노래한 詩도 사랑의 만남을 찬미하는 詩도 아닌, 그 어느 쪽의 詩라고도할 수 없습니다. 만남 속에 이별이, 이별 속에 만남이 있는 사람의 복합적인 -그레이 존- 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이별가라고 단정하고 동그라미를 치는 교육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김소월 읽기요 詩 읽기요, 나아가서는 삶의 읽기입니다.

▶누가 "메밀꽃 필 무렵"을 아시나요
文科 교실이 온통 사회과학적인 접근법 실증적 역사주의적 방법으로 일방통행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뉴크리티시즘, 수사학, 현상학적인 의식비평, 그리고 구조주의와기호학을 강의하고 있었지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효석의"메밀꽃 필 무렵"을 배우는 학생들은 소설의 구조 보다는 총독부의 토지 수탈 정책을 배우게 됩니다. 주인공 허생원이 장돌뱅이로 그려져 있는 것은 당시의 농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빼앗겼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유랑하는 잡상인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라는 풀이를 하기 위해서이지요.
틀린 말이 아니지요. 실제로 그 무렵 통계에도 토지를 잃은 사람과 장돌뱅이의 숫자는 상비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회과학적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이 역사적 상황이 바뀐 오늘에도 여전히 어떤 감동의 힘을 주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분명 소설은 사회의 현실을 담은 거울이기는 하지만 그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창조된 현실로 변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림으로 그려진 시체는 이미 그 시체와는 다른 존재 -라는 예술의 "모방"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 때부터 강조되어온 문제입니다. 시체를 보면 모두 도망가지만 그림 속에 그려진 시체는 뭇사람이 다가와 감동을 가지고 감상합니다.
예술작품은 현실에서 탄생된 것이지만 현실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성된 창조물인 것입니다.
"메밀꽃 필 무렵"을 外在的 비평방법이 아니라 작품 내부에 감춰 있는 구조로 눈을 돌리면 왜 그가 장돌뱅이로 설정되어 있는가 하는 내재적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이 이 장터에서 저 장터로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가 된 것은 물레방앗간에서 만난 -성처녀- 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찾는 자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한 것 -이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와- 달이 떠서 질 때까지 -의 두 시간축의 대칭 속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대낮의 장터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장돌뱅이로서의 불행한 허생원과 달밤의 밤길을 걸으며 사랑을 남들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꾼으로서의 행복한 허생원의 두 얼굴이 있지요.
그래서 낮에는 동이와 싸움을 벌이지만 밤길에서는 동이의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넙니다. 푸가 형식(둔주곡)처럼 그 대위법을 통해서 幸.不幸의 흑백체험이 심화됩니다. 그것이 달빛과 강물과 메밀꽃이 핀 밭이 온통 어렴풋한 하나의 빛으로 융합되어 있는 그 소설 공간입니다. 낮처럼 환한 공간도 아니며 그믐밤처럼 깜깜한 어둠도 아닌 메밀꽃과 달빛이 빚어내는 문자 그대로의- 그레이 존 -말입니다. --끝